글: 백승광 (새와 생명의 터 임진-한탄강 지역 대표)

2008년, 개발로 빠르게 사라져 가던 습지를 지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함께 출범시킨 한‧일 습지 네트워크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20주년 워크숍이 올해 연천에서 열렸습니다.

연천은 이미 국제 자연보전 체계 안에서 여러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생물권보전지역이자, 동아시아–대양주 철새이동경로 네트워크 사이트이며, 이동성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국제 협약 체계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날 저의 발제 제목은 “연천 생물권보전지역에서 람사르 습지”였습니다.
람사르 습지 추진은 단순히 또 한 곳의 지정이나 이름을 더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인정받은 연천이 이제 습지 보전의 국제적 기준인 람사르 협약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보전과 이용의 균형이라는 원칙을 하천과 습지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완성하는 일입니다.
연천의 강과 습지는 단지 지역의 자연 자산이 아닙니다. 동아시아 철새 이동경로의 거점이자, 생물다양성과 지역 공동체의 삶이 만나는 현장입니다. 람사르 추진은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확인 받는 절차이면서 동시에 우리 스스로 관리의 책임을 더 분명히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자연이 숨 쉬고, 생명이 안전하게 머무는 곳. 사람의 삶과 자연의 시간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도시.
람사르는 목표가 아니라, 연천이 걸어온 길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단계이며, 앞으로의 10년, 50년을 준비하는 기준입니다.

연천군과 협의된 논의의 출발점은 “람사르 습지를 빨리 등재하자”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연천의 생태적 가치를 어떻게 정리하고 공유할 것인가”였습니다

연천의 람사르 습지 추진 논의는 외부 단체의 요구가 아니라, 연천군이 기존 국제 지위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를 고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행정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번 과정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과학적 근거는 5년간의 현장 조사에서 나왔습니다


지난 5년간 연천 생물권보전지역에서는 조류 조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두루미와 재두루미를 포함해 최소 다섯 종의 물새가 람사르 협약이 요구하는 국제적 개체군 기준을 정기적으로 충족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연천의 습지는 우연히 새가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동아시아 대양주 철새 이동경로에서 반복적으로 이용되는 핵심 중간 기착지입니다.
연천의 습지는 ‘한 곳’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조사 결과, 주요 서식지는 세 개의 핵심 클러스터로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들은 각각 독립적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서로 연결될 때 하나의 생태 네트워크로 기능합니다. 람사르 습지를 한 지점이 아닌 공간 구조와 연결성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철새들만의 공간이 아닙니다.

연천의 습지에는 멸종위기 야생동물들도 함께 살아갑니다.
람사르 논의는 곧 연천 생태계 전체의 건강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이기도 합니다.

연천은 혼자가 아닙니다.
연천의 서부 생태권은 파주와, 동부 생태권은 철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루미와 기러기류는 행정구역이 아닌, 먹이터와 휴식지, 잠자리의 연결 구조를 따라 이동합니다. 람사르 논의 역시 연천만의 문제가 아니라, 광역적·연결적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연천군은 지난해 12월 18일 워크숍을 통해 두 가지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는 당분간 기존 철새이동경로 네트워크 관리에 우선 집중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람사르 지정 여부와 경계는 지역사회와 충분한 논의 없이는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합의는 앞으로 모든 논의의 기준이 됩니다. 람사르는 ‘명칭’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20주년 워크샵에서 발제를 한 새와 생명의 터 임진-한탄강 지역 백승광 대표는 연천군에 4가지를 제안했습니다.
첫째, 람사르 습지 논의는 연천의 미래를 위해 지역사회와 함께 설계하는 과정으로 추진해야 한다.
둘째, 주민, 시민단체, 전문가, 정책 결정자가 함께 참여하는 공식 협의체를 구성하고, 현자의 의견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셋째, 특정 습지에 한정하지 말고, 연천 전역 습지의 생물다양성 가치를 주민과 공유하는 논의로 확대해야 한다.
넷째, 훼손된 습지를 점검하고 자연기반해법 중심의 복원 체계로 전환해, 습지보전과 지속가능한 생태관광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이번 한‧일 습지 네트워크 20주년 워크숍에서, 람사르는 이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스스로 생태를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구조임을 상기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는, 연천군의 정책 결정자, 그리고 지역 주민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협력의 대화를 함께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